오늘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글귀는 위의 사진과 같다.
여기 작가는 물고기와 지렁이등의 생명체에게는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지만 새같은 생명체에게는 동정심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러면서 자신의 동정심은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는 동정심이 아니라고 한다.
동정심, 나라는 범위를 특정 대상까지 넓혀서 그 대상의 상황에 공감하는 것, 그렇기에 같은 정을 느끼는 마음이라 선조들께서 이름을 지은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공감, 동정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에서 세상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동물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는 것은 동물이라는 다른 종의 생물의 감정을 느끼고 그 동물의 시선에서 세상을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참 어려운데 인간은 다른 동물이 어떤 감각기관으로 어떻게 느끼는지 유추는 가능하지만 느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동물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는 말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동물들에게 대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물들의 상황을 판단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는 말은 맞는 표현일까? 동물들이 인간들과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특정 상황에서는 우리보다 더 깊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관점으로 생각해본다면 다른 이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는 것 또한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상황을 보고 느낀다는 것은 내가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상황을 인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평등을 이야기할 때 조심스럽게 다가가야한다.
우리가 성소수자들에게 공감을 하는 것은 내가 성소수자로서 인생을 살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공감이 아니라 이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비슷한 상황을 대입해서 유추는 할 수 있지만 공감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들의 상황을 모른척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고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을 우리가 단편적으로 이해해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 동정심이라기 보다는 연민일 것이다. 연민은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것으로 그들의 아픔에 대해서 가련하게 여긴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성소수자들이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을 불쌍하게 여겨달라고 자신의 힘든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적으로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의 삶을 모르기에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동정심을 느끼기 위해서는 서투른 공감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그들의 경험을 듣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우리의 사회를 보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 만들지 않을까? 나와 다르다고 단편적인 이해만을 추구하여 연민의 감정으로 그들을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과 공생을 하는 것이 앞으로 사회에 더 필요한 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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